세계의 수 많은 도시들 중에서, 흔히 ‘음악의 도시’를 지칭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도시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Vienna)’, 혹은, ‘빈(Wien)’이 아닐 까 생각된다. 여름 7월과 8월, 여름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일년 내내, 세계 최고 수준의 음악가들과 오케스트라들의 수 많은 음악 공연들, 오페라 공연들, 그리고, 다양한 장르의 예술 행사들도 끊임없이 열리고 있고, 이 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온, 정말 많은 수의 젊은 음악가들이 오래 역사와 전통을 지닌, ‘빈 국립음대(Universität für Musik und darstellende Kunst Wien)’에서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이 곳 비엔나로 모여든다. 한국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음악원 졸업 후에, 이렇게 음악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지닌 도시에서 음악을 지속적으로 공부하게 된 것은 분명히 감사할 일이라 생각된다.
Conductor – TaeJung Lee
2005년 10월부터, 빈 국립음대 지휘과에서, 오랜기간 동안 지휘 교수로 있었던, 슬로베니아 출신의 지휘자인 우로쉬 라이요비츠(Prof. Uroš Lajovic)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라이요비츠 교수는 과거 빈 국립음대 역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지휘 명교수였던, 한스 스바로브스키(Prof. Hans Swarowsky)의 제자들 중의 한 명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새로운 상임 지휘자인 키릴 페트렌코를 비롯한, 현재 유럽의 주요 오페라 극장들과 오케스트라들의 음악감독들로 있는 많은 뛰어난 지휘자들을 키워내었다. 그가 항상 자주 인용하던 문구 중의 하나는, 이 곳, 빈 국립음대의 지휘과 교수로서, 자신의 임무는,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 온, 비엔나 음악의 전통을 후세 음악가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며, 그가 학생 시절, 스바로브스키 교수가 자신을 포함한 다른 제자들에게도 항상 얘기 하던 내용이였다고 한다. 빈 국립음대의 음악교육은, 특히, 지휘, 작곡에 있어서, 그 해당 분야의 실제적인 실습 뿐 만이 아닌, 철저한 이론 교육이 병행 되어졌으며, 특히, 첫 2년 동안의 음악 교육은, 그레고리안 찬트부터, 르네상스 스타일의 모테트와 바로크 스타일의 푸가를 직접 쓰게 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음악분석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혹독한 음악이론 수업들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서양음악의 근본을 익히게 할려는 엄격한 수업형태였다. 또한, 음악 분석에 있어서는 단순히 악보를 정확히 분석 하는 것 뿐 만이 아닌, 그 작품들과 관련된 시대적, 역사적 상황과 다른 예술장르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 또한 이어졌다. 때때로, 음악분석 수업이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서 이루어지기도 했고, 분석을 해야 하는 음악작품들과 유사한 시기의 미술 작품들이나, 문학작품들, 혹은, 여러 다양한 건축물들과 그 양식에 대한 강도 높은 분석과 토론이 같이 병행 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들은, 지휘자로서 하나의 작품을 스스로 배우고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지휘자로서의 관점만이 아닌, 다채로운 관점에서 그 작품을 바라보고 인지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함으로 보여졌다. 실제 지휘 수업에 있어서는, 거의 매주, 각각의 작품들의 길이와 규모와는 상관 없이, 하나의 작품을 완전히 익혀야 되며, 첫 시간은 지휘과 교수와의 철저한 작품 분석, 그리고, 그 다음은 실제 오케스트라와의 작업을 통해 그 작품을 지휘함으로서 그 한주의 지휘 수업은 마무리 되었다. 단순히 오케스트라를 통해 하나의 작품을 지휘하는 것 만이 아닌, 그 해당 작품에 있어서, 어렵고 까다로운 부분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연습을 시키고, 주어진 시간안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력을 어떻게 빨리 향상 시키느냐가 중요한 요소였다. 뿐만 아닌, 오페라 코치와 오페라 지휘, 합창 지휘, 그리고, 현대음악 지휘가 완전히 분리 되어 수업이 진행 되었기에, 또한, 수 많은 이론 수업들을 포함해서, 한 학기 동안 지휘자로서 배우고 지휘해야 될 곡들이 너무 많았기에, 주변의 많은 수의 동료 학생들 중에는, 가장 필수적인, 지휘할 작품들에 대해 깊이 배우지 못하고, 지휘 단상에 올라가 지휘라는 것을 할려고 하는 경우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With Maestro Uroš Lajovic in Ljubljana
비엔나 음악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교수로서의 임무라고 했던 라이요비츠 교수 조차, 역설적으로, ‘지휘’라는 분야는 결코 ‘학문’의 분야가 아니며, ‘지휘’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가르치거나, 어느 누구로부터 결코 배울수 없는, 항상 스스로 깨닫고 터득해야 하는 분야라는 것을 자주 강조하였으며,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과, 이 곳, 빈 국립음대라는 ‘음악학교’에서의 수 많은 수업들은 어디까지나, 음악과 음악작품들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보조적인 도움들일 뿐이라는 것을 여러 번 언급하기도 하였다. 많은 음대의 지휘 과정들이 어느 부분들에서는 비슷하겠지만, 오페라의 경우는 한 학기에 올려지는 여러 공연들을 위해, 이미 대략 일년전 부터 기획하여, 성악과와 연출과의 교수들, 학생들과 공동으로 작업해야 하는 다소 복잡한 과정들 이었다. 모든 리허설에 있어서, 오페라 연출과 교수, 학생들과 같이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 뿐이 아닌, 부지휘자와 오페라 코치로서도 일을 해야 했으면, 공연시에는 오페라과 지휘 교수에 의해 첫 공연이 이루어진 후, 오케스트라와의 연습 없이, 그 다음 공연들을 바로 직접 지휘를 하기도 해야 했다. 5년 동안, 라이요비츠 문하에서의 지휘 공부 후, 1년 동안은, 오페라 코치와 오페라 지휘 교수로 있는, 콘라드 라이트너 교수(Prof. Konrad Leitner)와 오페라 코치를 중심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과거, 칼 뵘, 클럼페러, 카라얀 등등 많은 대가들의 어시스턴트였고, 오랜 기간동안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오페라 코치로 있었던, 오페라 분야에 있어서는 산 증인이라고도 불리울 수 있는 음악가였다. 라이트너 교수는 오페라를 학교가 아닌, 이미 그가 어린 시절 부터, 오페라 극장에서 익히고, 배워왔기에, 단순히 악보에 적힌데로 정확히 재현하는 것 만이 아닌, 실제 오페라 극장에서 어떻게 가수들이 노래를 하고 있고, 과거의 대지휘자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연습시키고, 공연을 했는지를 전수해 줄려고 하였다. 1년 동안의 오페라 코치 공부 후, 빈 국립음대에서의 마지막 2년은 라이요비치 교수, 그리고, 특별히 객원 교수들로 초청된, 베어트랑 드 비이(Mo. Bertrand de Billy)와 파비오 루이지(Mo. Fabio Luisi) 문하에서 지휘를 공부하게 되었다. 당연히, 빈 국립음대의 지리적 이점도 있겠지만, 공연을 위해 빈을 방문하는 많은 세계적인 지휘자들이 그들의 공연 전, 혹은, 후에, 빈 국립음대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거나, 지휘자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를 하는 것이 오랜 전통으로 되어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다른 여러 대가들의 마스터클래스에도 참여를 해왔지만, 빈에서는, 인도출신의 대지휘자이자, 빈 국립음대의 대선배인, 마에스트로 주빈 메타(Mo. Zubin Mehta), 그리고, 현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있는 사이먼 래틀(Sir Simon Rattle)과의 마스터클래스에 선발되어 지휘를 하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두지휘자들이 그들이 빈에서 빈 필하모닉과 빈 국립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하는 동일한 작품들을 지휘해야 되었기에, 마스터클래스에서 지휘하는 것 뿐만이 아닌, 그들이 리허설과 공연을 어떻게 하는 지를 관찰하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울 수가 있었다. 마스터클래스에서의 가르침 뿐만이 아닌, 연습 중간이나, 공연 후에도 동일한 지휘자 입장에서의 많은 조언들, 또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돌이켜보자면, 빈의 음악교육은 과거 비엔나의 대작곡가들 시대부터 이어져 온 서양음악의 ‘전통’ 과 ‘근본’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인지시키고, 그러한 훌륭한 전통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그러한 바탕 위에, 다음 세대 음악가들이 또 다른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도록 하기 위함으로 생각되어졌다.
With Sir Simon Rattle in Vienna
특별히, 빈 국립음대에서의 학업 기간 동안 기억에 남는 것은, 2005년부터 이 곳에서 공부를 시작했을때, 지휘과정에 많은 수의 북한인 학생들이 있었던 점이다. 대한민국의 실정상, 남북한이 지금까지도 여러가지 면에서 대치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젋은 북한인 음악가들과 같은 학교, 같은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했고, 음악하는 동료로서, 어떠한 방식으로 이들과 교류를 해야 할지 나름 난감하기도 했었다. 북한 학생들의 숫자가 꽤 많았기에, 처음 수업을 들었을 때에는, 교수를 포함, 몇몇 이 곳의 유럽이나 다른 국가들 출신 학생들이 차라리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였었다. 빈 국립음대에서 수학한 북한인 지휘 학생들은, 2000년대 초반, 북한에서, 젋은 세대의 지휘자들을 양성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북한 내에서 엄격한 심사를 통해 선발되어진, 북한 최고의 엘리트 음악가들이었다. 당연히, 빈 국립음대 입학 시험을 통과해야 했으면, 들은 바에 의하면, 국가에 의해서 선발되어졌기 때문에, 군면제를 받고, 국가의 모든 지원을 받아서, 해외로 나와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한 학기 전체 학점이 어느 정도 점수가 안 될 경우, 다시 북한으로 송환되어져서, 군복무를 해야 된다고 들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정말 뛰어난 음악가들이기도 했지만, 그 만큼, 이들의 학업에 대한 엄청난 열정과 놀라운 성취도 만큼은, 전체 빈 국립음대에서 항상 화자화 되어지기도 했었다. 대부분의 북한인 학생들이 북한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그 중에는 과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공부한 친구도 있었고, 공화국 최고의 인민 피아니스트 칭호를 받은 피아니스트 출신 친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들 북한 지휘과 학생들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수준이 워낙 높았기에, 빈 국립음대의 피아노과의 학생들 보다, 이들의 연주실력이 훨씬 더 높다는 얘기를 자주 듣기도 했었다. 서양음악 역사의 많은 부분들이, 이 곳 유럽의 종교와 종교음악과도 밀접한 연관이 많기에, 수업 시간 중, 이 곳의 교수들이, 음악역사에서 언급되어지고 논의 되어질 수 있는, 신의 존재에 대해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북한 학생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신과 종교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고, 그러한 것들이 무엇 때문에, 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나태낸 적이 많이 있었다. 또한, 한국 뿐만이 아닌,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작곡가 윤이상 선생에 대해선, 북한의 모든 음악가들과 인민들은, 비록, 그가 남조선 출생이기는 하지만, 윤이상 선생이야 말로, 근본적으로 우리 북조선의 위대한 작곡가이며, 왜 남조선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90년대에 들어와서야 그를 남조선의 작곡가라 칭하기 시작했는지 전혀 이해 할 수가 없고, 그러한 것은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의견을 피력 하기도 하였다. 전체 빈 국립음대 학생들 중에서는 과거 소비에트 연방이나 동유럽 국가들 출신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를 경험한 학생들도 다수 있었지만, 이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사물이나 사상을 대하는 점에서 많은 차이점을 발견하기도 했었다. 북한 학생들은 매년 여름 방학 기간 동안은 북한에서 머물렀는데, 그 다음 새로운 학기가 시작 되었을때, 아직 졸업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생들이 다시 비엔나로 오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담당 교수인, 라이요비츠 교수도 왜 이 학생들이 학업을 위해 다시 빈으로 되돌아 오지 않았지에 대해, 빈으로 돌아오게 된 다른 북한인 학생들에게 재차 여러번 묻기도 했지만, 다들 굳은 표정으로, 어느 누구도 어떠한 답변을 하지 않았고, 그 당시 수업 시간은, 오직 무거운 분위기속에 진행된 것으로 기억이 된다. 같은 민족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이념과 체제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지만, 남북한의 젋은 지휘자들이 지리적으로 먼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그것도 한 학교, 한 교실에서 함께 음악을 함께 공부하고, 교류를 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만이 아닌, 여러 면에서 정말 많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엔나라는 음악의 도시에서, 잠시라도 이념과 체제를 잊고, “음악” 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음악을 위해, 젋은 시절의 한 부분을 함께 한, 이들 북한인 동료 지휘자들과 함께, 언젠가는 가까운 미래에 한 무대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염원할 뿐이다.
With Maestro Zubin Mehta in Salzburg
비엔나라는 도시가 전 세계에서 항상 음악의 도시로서 쉽게 지칭되어질 만큼 세계최고 수준의 오페라 공연들, 그리고, 세계 최정상의 음악가들과 오케스트라들의 공연들이 거의 매일매일 열리고 있고, 이 곳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젋은 음악도들이 이러한 공연들과 이 공연들을 위한 연습과정들을 언제든지 듣고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가치 있는 일이었다. 특히, 비엔나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인 비엔나 필하모닉을 비롯한, 빈을 방문하는 최정상의 오케스트라들의 모든 연습과정들과 그 공연들에 참관하게 되어, 학교라는 울타리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너무나도 음악적으로 뛰어난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주빈 메타 등이, 빈에서 공부 할 시절에는 지금처럼 리허설을 볼 수 있는 것이 쉽게 허용이 안 되었지만, 현재에는 이 곳의 대표적 공연장인 무직페라인과 비엔나 콘체르트하우스는 언제든지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리허설을 볼 수 있도록 개방이 되고 있다. 비엔나 필하모닉이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오케스트라의 거의 모든 공연들을 위한, 첫 리허설 부터 마지막 최종 리허설, 그리고,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총 3회에서 4회까지 열리는 연주들을 보면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었다. 대가라 불리우는 지휘자들이 어떻게 지휘하는 것 뿐만이 아닌, 이렇게 세계최고의 오케스트라의 음악가들과는 리허설 과정에 있어서 어떻게 교류를 하며, 본인이 음악적으로 원하는 것를 어떠한 방식으로 성취해 내는지, 마찬가지로, 각각의 단원들이 그들 오케스트라의 수준과 명성에 걸맞게 그들이 기꺼이 초대한 지휘자들이 원하는 것 그 이상을 음악으로 실행 하는 것을 듣고 보고 매번 소름이 돋을 정도의 음악적으로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In Piran, photo by Marijan Zlobec
이탈리아 최고의 마에스트로인, 리카르도 무티의 경우는 빈 필하모닉과의 리허설 중간에, 자기는 공연을 위해 초청되어져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지만, 매번 결코 변하지 않는 빈 필하모닉 고유의 사운드와 이러한 엄청난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내는 음악을 듣고, 아직도 음악적으로 이 오케스트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빈 필하모닉과의 공연을 하게 되는 지휘자들 중에는, 그들의 리허설을 경청하는 젋은 지휘자를 위해 직접적으로 많은 조언을 주기도 하였다. 리카르도 무티의 경우는 하이든의 오케스트라 작품인 “일곱 마지막 말씀(Sieben letzte Worte)” 리허설 도중에 갑자기 나를 쳐다보더니, 특유의 이탈리아 액센트가 섞인 영어 발음으로, “The conducting is……,”라는 말을 한 후,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작 사인 만을 주더니, 바로, 두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로,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경청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빈 필하모닉은 무티의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 무티가 지휘했을 때 보다, 더욱 더, 기막힌 음악을 만들어 내었다. 이때, 무티는 실제적으로 지휘를 하는 신체적인 동작을 하지는 않았지만, 주요선율이 어느 솔로 악기나 악기 그룹에서 연주되는 경우나, 템포가 바뀌는 경우, 그저 살짝 눈짓만을 주기도 하였고, 그러한 무티의 미세한 움직임과 표현에도 완벽하게 그가 원하는 바 이상을 오케스트라가 표현해 내었다. 오케스트라의 마지막 화음 후에, 마에스트로 무티가 나를 다시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짓던 기억이 난다. 마에스트로 무티가 그러한 다소 특별한 리허설 과정을 통해 젊은 지휘자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훌륭한 오케스트라들일 수록,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내는 음악을 절대 방해하지 말고, 최소한의 지휘를 통해, 혹은, 역설적으로, 지휘자의 최종 목적은 지휘, 그 자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오케스트라와 하나가 되고, 영적으로 동화가 되어, 오케스트라가 최상의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음악, 그 자체만을 전달해야 된다는 의미로 받아 들여졌다. 다니엘 바렌보임이나, 마리스 얀손스와 같은 지휘자들은 리허설 도중, 자기가 방금 말한 내용이 너무 중요한 내용이기에, 지금 가지고 있는 오케스트라 총보에 그 내용을 적으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주빈 메타의 경우는 리허설이나 공연 후에, 방문하게 되었을때, 항상, 그가 젋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많은 작품들을 지휘해 오면서 깨닫게 된, 연습과 공연에 있어서 너무나도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중요한, 많은 조언들을 해 주었다. 예를 들자면, 같은 작품을 지휘하더라도, 어느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지, 그리고, 그 연주가 되는 각 홀들에 따라서, 여러 상이점이 너무 많기에, 언제나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지휘하거나, 같은 음악을 만들 수는 없으면, 그 상황에 맞게 항상 다르게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그가 젋은 시절, 지난 세기의 대지휘자인 카라얀으로 부터, 어떠한 중요한 조언들을 들었는지도 자주 얘기를 해 주었다. 사이먼 래틀의 경우는, 항상, 내가 지금 어떤 작품들을 공부하고 준비하는지를 물어왔고, 어떤 방식으로 그 작품들을 공부해 나가야 되는지,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또한, 자기가 지휘하는 작품들을 위해서 어떤 문헌이나 책을 읽었는지를 알려주기도 하였다. 젋은 지휘자로서, 많은 지휘자들의 연습과정과 공연을 관찰하는 것 뿐만이 아닌, 빈을 방문하는 여러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들의 사운드를 체험하고, 같은 곡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음악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고, 듣는 것도, 엄청난 공부가 되었다. 러시아의 오케스트라들이 연주하는 러시아 음악,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오케스트라들이 만들어 내는 그들의 음악들.
With the Radio Symphonieorchestra Vienna at the Musikverein
비엔나를 대표하고, 상징할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오페라 극장인, 비엔나 국립극장에서 정말 셀 수 없을 정도의 공연들과 연습과정들을 보게 된 것도 정말 가치 있는 시간들이었다. 9월 시즌 시작 부터, 다음 해 6월 말까지, 거의 매일 열리는 엄청난 공연들, 그리고, 그러한 공연들이 제작되어지는 과정들을 본다는 것은 젋은 음악가의 시야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주었다.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리허설은 유감스럽게도, 엄격한 통제가 심하지만, 한국 출신의 대성악가이신, 베이스 연광철 선생의 도움으로 별다른 큰 어려움 없이, 정말 많은 대가 지휘자들과 세계적 가수들의 연습과정과 그 공연들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기회가 있을때 마다, 오페라 코치로서, 이런 대성악가와 함께 같이 작업함으로써 많은 것들을 배워 나갈 수 있었다. 연습이나 공연 후에는 성악가의 입장에서 각각의 오페라 작품들을 어떻게 배우고,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을 해가며, 연습과 공연을 위해 어떠한 준비 과정을 가지는지, 그리고, 당연히, 바그너 음악의 세계최정상 성악가로서, 작곡가 바그너와 그의 작품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러한 음악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어떻게 접근을 해가야 되는 지에 대해서, 또한, 한국인이자, 동양인 음악가로서 국제무대에서 활동한다는 것과 그러한 것들을 위해 어떠한 것들이 필요한지 등등, 매번 너무나도 중요하고 값진 조언들을 해 주셔서, 언제나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Dirigent – TaeJung Lee
빈 국립음대에서의 음악수업과 여러 대가들과 오케스트라들의 리허설과 연습을 관찰하는 것 뿐만이 아닌, 지휘자로서의 실제적인 일인, 여러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이 감사하게도, 학생 시절부터 이미, 시작되게 되었다. 빈 국립음대에서의 여러 다양한 오페라 프로덕션에서 지휘하는 것 뿐만이 아닌, 빈의 오페라 극장 중에 하나인, 비엔나 폭스오페라 극장의 지휘자이자 캐스팅 디렉터 였던, 덴마크 출신의 지휘자인, 닐스 무스(Mo. Niels Muus)에게 발탁이 되어, 그가 음악감독으로 있었던, 슈타이어 음악페스티발(Musikfestival Steyr)에서 오페라 공연들을 위한, 부지휘자와 오페라 코치로 일하게 되었다. 이 곳에 출연했던 성악가들이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이나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등, 국제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기에, 공연과 리허설에 대한 준비가 그들의 수준에 걸맞게 철저히 되어져야 되었으며, 공연 기간 중은 음악감독의 병고나 부재시 바로 투입되어 공연을 해야 되었기에, 언제나 긴장 상태로 준비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푸치니의 “나비부인”과 비제의 “카르멘”의 한 공연들을 지휘해야 되었는데, 유럽특유의 전통답게, 오케스트라와의 어떠한 연습 없이, 공연에서 바로 지휘를 해야 되어서 정말 많은 준비를 해야 되었었다. 공연들에 출연하는 대다수의 성악가들이 해당 오페라들을 대략 200회 이상 공연을 해 왔기에, 모든 공연들이 원활히 잘 진행이 되어졌던 것 같다. 오페라 지휘로 명성이 있는, 프랑스 지휘자인, 베어트랑 드 비이의 부지휘자로 선발 되어,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가 초연되기도 했었던, 비엔나의 유서깊은 오페라 극장 중의 하나인,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에서, 힌데미트의 오페라인, 화가 마티스(Mathis der Maler) 프로덕션을 위해 부지휘자로 일을 하게 되기도 하였다. 특별히, 바이로이트 페스티발과 짤쯔부르크 페스티발 등에서 주역가수들로 공연을 해 온 독일어 오페라 영역에서 가장 뛰어난 성악가들과 작업을 하게 되어, 정말 엄청난 준비를 해야 되었던 기억이 난다. 첫 연습 2주전에, 이 프로덕션을 위해 일 하는 것이 결정이 되었기에, 주어진 이 2주 동안, 하루에 1시간에서 2시간만씩 자고, 하루 종일 이 오페라를 배우고 익혀야 되는 상황이었다. 개인적인 준비 과정은 힘들고, 압박감이 많았지만, 베어트랑 드 비이를 비롯하여, 바그너 오페라 연출이 전문인, 키스 워너(Keith Warner)와 같은 영국인 출신의 대연출가와 같이 일을 하게 되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였다. 전체 리허설 기간 동안 거의 매일 10시간에서 때론 15시간이 넘는 리허설을 해야 되었기에, 역시, 오페라 프로덕션이란, 일반 콘서트를 위한 준비와는 비교하기가 힘들 정도로, 중노동에 가까운 체력전이라는 것을 매번 실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 후, 다른 오페라들의 리허설이나 공연들이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여겨지게 된 것 같았다. 빈 국립음대 재학 시절, 운이 좋게도, 비엔나의 대표적인 공연장인, 비엔나 무지페라인에서 3번의 공연을 하게 되기도 하였다. 빈 필하모닉과 이 곳 오케스트라들에서 일하는 젋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현대오페라를 연출을 가미하여 공연하기도 했고, 비엔나 방송교향악단과 두 차례에 걸쳐 공연하기도 하였다. 항상 실제무대에서만 감지하게 되고, 실질적인 느낌으로 알게 되지만, 무대라는 곳에서 공연을 하면 할 수록, 그 음악회를 듣는 이들인, 청중들이, 연주되는 음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느껴질 때가 많이 있었다. 청중들을 너무 의식해서는 안 되겠지만, 연주를 하는 입장에서, 이 음악을 듣는 청중들의 상호반응에 따라, 실제 연주에 있어서, 리허설 때와는 차이가 있는, 다른 차원의 음악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 같다. 이 세상 모든 지휘자들에게는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악기가 되고, 모든 오케스트라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란 존재들에 의해 구성되어지고, 연주되어지기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이 없다면, 지휘자란 존재 자체가 아예 무의미해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러하기에, 모든 음악가들에게는,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겠지만, 유일하게, 지휘자야 말로, 어떠한 소리도 생산해 내지 못하는 음악가이기에, 실제적으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항상 기본이 되어야 되는 것 같다.
At Bled lake, photo by Marijan Zlobec
‘비엔나’라는 예술적으로 최상의 조건을 가진 도시에서, 한 명의 음악가가, 너무나도 많은 가치있는 것들을 배우게 되고, 발전하게 된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라 항상 생각된다. 수 많은 공연들을 통해서 보게 된 많은 음악가들을 통해서, 진정한 ‘대가’라 불리울 수 있는, 진짜 훌륭한 음악가들은, 무대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연주되어지는 작품의 작곡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그 분명한 의도와, 그 음악 자체를 청중에게 어떠한 가감 없이, 순수하게 전달을 할려는 것을 항상 경험하게 되었다. 공연을 위해서 무대에 서는 또, 한 명의 지휘자이자 음악가로서, 그러한 경험들이 앞으로 어떻게 음악을 해야 되는지에 대해, 너무나도 선명한 혜안을 준 듯 하다.
Marijan Zlobec